‘이런 승부차기는 없었다’ 울산-포항전 승부차기의 재구성

정인수 기자 | 입력 : 2020/09/24 [08:14]

[신한뉴스=정인수 기자] 승부차기에서 나올 수 있는 거의 모든 장면이 이 경기에서 다 나왔다. 울산현대와 포항스틸러스의 2020 하나은행 FA컵 4강전 승부차기는 역대 어느 승부차기보다 흥미진진했다.

울산현대는 23일 울산문수축구경기장에서 열린 2020 하나은행 FA컵 4강전에서 연장전까지 1-1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4-3으로 포항스틸러스를 물리쳤다. 이로써 울산은 2017년 대회 우승 이후 3년 만에 타이틀 재도전에 나서게 됐다.

이날 승부의 백미는 승부차기였다. 연장전까지 120분 동안의 혈투도 피 튀겼지만 승부차기는 그야말로 피를 말렸다. 양 팀의 첫 번째 키커부터 심상치 않았다. 울산의 첫 번째 키커 비욘존슨이 무난하게 골을 성공시킨 반면 포항 일류첸코의 오른발 슈팅은 조현우의 손끝에 걸렸다. 울산의 선축으로 시작된 승부차기에서 울산이 처음부터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두 번째 키커인 울산 원두재와 포항 심동운은 나란히 골을 성공시켰다. 그런데 세 번째 키커의 대결에서 다시 한번 희비가 엇갈렸다. 이번에는 포항이 웃었다. 울산의 세 번째 키커인 김인성의 킥이 강현무의 선방에 걸렸다.

그러나 주심이 VAR실과 소통한 끝에 김인성에게 페널티킥을 다시 차라는 판정을 내렸다. VAR 판독 결과 김인성이 킥하기 직전에 강현무의 두 발이 모두 골라인 앞으로 나왔던 것이다. 골키퍼는 페널티킥을 막을 때 키커가 킥을 하는 순간까지는 두 발 중 한 발이라도 골라인에 걸쳐있어야 한다.

펄쩍 뛰며 기뻐하던 강현무가 머쓱해졌다. 강현무는 다시 골라인에 섰고, 김인성이 재차 호흡을 가다듬고 킥을 시도했다. 그런데 또다시 강현무의 선방이 빛났다. 잔뜩 위축된 김인성은 처음 시도했던 페널티킥과 반대 방향으로 킥을 시도했지만 위력이 약했고, 이는 강현무의 손에 걸리고 말았다. 반면 포항의 세 번째 키커 강상우는 골을 성공시켰다. 승부차기 2-2 동점.

네 번째 키커인 윤빛가람과 이승모는 모두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켰다. 이제 마지막 5번 키커들만 남았다. 둘 중에 한 명이 성공하고, 한 명이 실패하면 곧바로 승부가 갈리는 상황이다. 이때 먼저 키커로 나선 주니오의 킥이 허망하게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울산의 아쉬움도 잠시. 뒤이어 키커로 나선 팔로세비치의 킥도 주니오와 마찬가지로 허공을 갈랐다. 두 선수는 하릴없이 잔디만 바라봤다.

6번째 키커부터는 서든데스로 승부가 갈린다. 먼저 나선 울산 정승현의 킥은 강현무의 손에 걸렸다. 정승현이 킥을 하기 전부터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던 강현무는 포효했고, 정승현은 고개를 떨궜다.

그런데 곧바로 등장하는 선수가 가관이다. 방금 전 승부차기를 막아낸 강현무가 직접 키커로 나섰다. 울산 골키퍼 조현우가 더욱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강현무의 발을 떠난 공은 골대 가운데로 향했고, 조현우는 자신의 왼쪽으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강현무의 킥은 조현우의 발에 걸려 골라인을 넘지 못했다. 파이팅 넘치던 강현무는 머리를 감싸쥐었고, 조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7번째 키커는 울산 이동경과 포항 최영준이었다. 이동경의 선축은 크로스바를 강타한 뒤 땅에 맞고 골대 밖으로 나왔다. VAR 시스템이 다시 가동됐다. 결국 이동경의 슛은 골라인을 넘지 못해 노골로 판정됐다. 이제는 승부가 마무리되겠다고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승부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최영준이 심혈을 기울여 인사이드로 구석을 노린 슈팅은 골포스트를 비켜나가고 말았다. 다 잡았다고 생각한 승부를 놓쳐서인지 포항의 분위기가 잔뜩 가라앉았다.

8번째 울산의 키커는 홍철. 그는 승부차기를 피하고 싶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팀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키커로 나왔고, 천신만고 끝에 골을 성공시켰다. 이제 포항의 8번째 키커 송민규의 발에 모든 게 달렸다. 하지만 송민규의 발을 떠난 공은 다시 한번 조현우의 손에 걸리고 말았다. 길고 길었던 승부차기는 이렇게 8번째 키커까지 간 끝에야 막을 내렸다.

경기 후 기자회견장에서도 승부차기가 주된 화두였다. 먼저 김기동 포항 감독은 골키퍼 강현무가 키커로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5명의 승부차기 키커는 미리 결정했는데 강현무가 자기도 자신 있다며 5명 안에 넣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나중에 차는 것이 낫다고 봤다. 그래서 마지막에 기회가 오면 차라고 했고, 6번째 키커로 나가게 됐다”고 말했다. 강현무 자신이 킥을 막고, 직접 넣기까지 했으면 최상의 시나리오였겠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이날 승부차기에서 상대의 킥을 세 번이나 막아낸 조현우는 상대 골키퍼 강현무가 키커로 나서는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밝혔다. 조현우는 “솔직히 (강)현무가 찰 거라고 생각을 못했는데 찬다고 했을 때 현무의 킥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끝까지 기다리면서 막았는데 좋은 결과가 있었다. 오늘 경기를 잊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덧붙여 조현우는 “현무가 긴장되는 상황에서도 승부차기를 즐기는 모습은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골키퍼는 끝까지 차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무도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승부차기 자체는 흥미로웠지만 잔디 상태는 이를 받쳐주지 못했다. 이날 키커들이 킥을 할 때마다 잔디가 패이는 바람에 유난히 실축이 잦았다. 이에 대해 김도훈 울산 감독은 “울산시 측에서 잔디 관리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알지만 오늘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앞으로는 좋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기동 포항 감독은 “심리적으로 선수들이 불안한 가운데 흔들렸지만 이는 울산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선수들이 좀더 집중해야하지 않았나 생각한다”며 의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관련기사목록
헤드라인 뉴스
1/20
광고
광고
광고